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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시설 사인디자인 과연 몇 점인가?
2005-05-01 |   지면 발행 ( 2005년 5월호 - 전체 보기 )

우리는 집 밖을 벗어나면서 많은 공공시설을 이용하게 된다. 전철을 타고, 학교를 가고, 쇼핑을 가고, 여행도 가고…. 일상생활속서 여러 가지 공공시설을 이용할 때 우리는 사인에 의지한다. 익숙하지 않은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안내시스템이 제대로 돼 있지 않은 사인 때문에 일일이 사람을 붙잡고 어디를 어떻게 가야하는지 물어본 경험이 있으리라. 사인이 제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결국 불필요한 예산과 인력을 낭비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번호는 공공시설의 정보를 전달하는 사인시스템의 기본적인 기능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디자인에 대해서 알아본다. <편집자 주>

경쟁적으로 생겨나는 컨벤션센터
최근 몇 년 사이 대규모 컨벤션센터가 전국에 속속 들어서고 있다. 수 만 평 전시공간과 수 천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국제회의장은 물론이고 호텔이나 식당, 쇼핑센터 등 편의시설도 함께 갖춘 멀티플렉스 공간이 전국 곳곳에 경쟁적으로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2003년 3월 제주도 서귀포 제주컨벤션센터(ICC Jeju)에 이어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KINTEX)가 지난 4월 개장했고, 광주 젝스코(GEXCO)가 올해 7월, 경남 창원 세코(CECO)가 올해 9월이면 문을 연다. 또 울산, 대전이 2006년 완공을 목표로 컨벤션센터를 추진 중에 있고 서울도 제2의 코엑스(COEX)를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이 밖에 인천 송도, 수원 등 지방자치단체들마다 경쟁적으로 전시장 건립에 나서고 있다. 서울 코엑스, 부산 벡스코(BEXCO), 대구 엑스코(EXCO) 등이 이미 운영하고 있는 가운데 전국 곳곳에서 그 이름마저도 비슷비슷한 컨벤션센터를 속속 건립하면서 머지않아 공급 과잉상태에 이를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다.
우선 이 좁은 나라에 과연 이렇게 많은 컨벤션센터가 필요한지는 여기에서 논의하지 않기로 하자. 또 일반 관람객이나 해외 바이어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교통망이 잘 연계돼 있는지도 역시 논의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하자. 그리고 과연 그렇게 규모가 큰 복합 멀티플렉스 공간에서 얼마나 많은 국제적인 행사를 개최했고, 또 앞으로 개최할 계획인지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기로 하자. 그렇지만 과연 그 규모가 매머드하고 국제적인 공간에 어울리는 사인시스템 디자인이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다른 문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더라도 그나마 사인시스템은 지금이라도 적은 예산으로 수정이나 보완이 충분히 가능한 문제기 때문이다.
체계적이지 못한 공공시설 사인시스템
지금은 이런 컨벤션센터가 대부분 비어 있는 상태라 오히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여러 나라에서 수 만 명이 몰려와 다국어를 구사하면서 동시에 이 공간을 사용하게 될 것을 가정해서 기존 사인시스템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을지 함께 생각해 보자. 우선 전체 공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인포메이션 시스템은 제대로 갖추고 있는가? 그리고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 화장실, 코인라커 등 위치는 금방 확인할 수 있는가? 택시나 셔틀버스 승강장으로 이동하는 경로는 잘 표시돼 있는가? 같은 건물 안에서 연결돼 있는 호텔이나 극장, 쇼핑센터, 식당 등 주변 시설로 이동하는 동선을 확인하는데 불편함은 없는가? 만약 전시장 내부에서 화재 등 비상사태라도 발생한다면 대피할 수 있는 비상구는 쉽게 찾을 수 있는가? 장애인을 위한 사인시스템은 불편 없이 제 구실을 하고 있는가? 이런 몇 가지 체크 포인트를 가지고 몇몇 컨벤션센터를 둘러본 결과, 예상했던 대로 그다지 높은 점수를 줄 수 없었다. 대부분 사인시스템이 형식적으로 배치돼 있을 뿐, 그 위치나 크기는 관람객의 동선이나 눈높이를 고려하고 있지 못했고, 특히 비상시 사용할 수 있는 설비나 대피 경로를 알려주는 사인의 판독성은 매우 낮았다. 디테일에 있어서는 대부분 사인에 내부조명을 설치하지 않아 어두운 곳에서는 작은 글자나 아이콘을 확인할 수 없는 것 역시 문제였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비단 컨벤션센터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관공서는 물론이고, 일반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도서관이나 박물관, 공연장, 운동장, KTX 역사, 공항 등 새로 생기는 공공시설 대부분이 그 근사한 외형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사인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아니, 시스템이란 단어를 사용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체계적이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 근본적인 문제점은 사인시스템에 별도 예산을 편성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사인시스템이 인테리어 시공에서 이뤄지는 설치물 일부로 인식하고 있어 전문가의 참여가 원천적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미 지어진지 오래된 공공시설들은 그 상태가 더욱 심각하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사용자의 필요성이 생겨났고, 그 결과 여러 가지 사인이 아무런 규정 없이 과잉 난립하게 된 것이다. 이른바 ‘땜빵’ 사인 등장이다. 그러다보니 사인 크기, 컬러, 서체 등 모든 것을 주먹구구식으로 편성해 왔고, 이 과정에서 전문가 참여를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결국 그로 인한 불편은 일반 이용자의 몫으로 고스란히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정보 중요도에 따른 사인 시스템,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
1996년 4월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해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는 참사가 일어났다. 독일 소방 당국이 그 원인을 조사해본 결과, 과잉 난립한 사인이 오히려 비상시 대피하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초래해 많은 사람이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이 조사는 소방관과 함께 인지공학자, 색채심리학자, 사인디자이너 등 전문가가 참여했다고 한다. 대구 지하철 참사 조사 과정에 색채나 사인디자인 등 전문가가 참여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대피할 수 없었던 원인이 어쩌면 사인시스템에 있었던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분석해 보려는 노력은 기대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뒤셀도르프 공항 측은 이후 에릭 슈피커만(Erik Spikermann)이 운영하는 메타디자인(MetaDesign)에 공항 사인시스템 리뉴얼을 의뢰했다. 물론 새로운 사인디자인 과정에는 많은 전문가 참여와 이용자 표본조사(Usability Test) 등을 철저히 했다고 한다. 공항 내 약 1,500개 안내 사인을 분석한 결과 그 가운데 반 정도가 겹치고 있다고 판단했다. 새로운 시스템에 구조적 위계질서(structural hierarchy)라는 개념을 적용해 정보는 급한 순간 무엇이 더 중요한가에 따라 재편성했다. 예를 들어 비행기를 타려는 승객은 비행기에서 내린 승객보다 더 서두르는 경향이 있으므로 비행기 출발 안내 사인을 도착 안내 사인보다 먼저 보이도록 배치했다. 아울러 컬러도 교통수단에 대한 정보는 녹색바탕에 흰색 글자로, 서비스에 관한 정보는 회색바탕에 흰색 글자를 적용했다. 긴급을 요구하는 사인에는 특히 주의를 기울였다. 바로 눈에 띄어야 하는 사인에는 자극적인 황록색을 사용했다. 모든 사인은 30m 거리에서도 인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서체는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서체는 특히 공항 내에 사용하고 있는 다양한 조명 장치를 고려해 ‘인포(Info)’를 사용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새로운 사인시스템이 새로 탄생했고 1년 뒤 화재 발생 이전에 비해 공항 인포메이션 데스크에서 처리해야 했던 질문 건수가 반 이상 줄어드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통해 새로운 사인 시스템이 사용자들에게 얼마나 편의를 제공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바닥을 이용한 새로운 사인 시스템 가능성
최근 공공건물 건축은 철골 트러스 구조와 유리를 이용해 높고, 넓고, 투명한 실내 공간을 만드는 것이 경향이다. 따라서 천장에서부터 아래로 늘어뜨리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인을 설치하기가 어렵게 됐다. 결국 시선이 집중되는 눈높이에 사인을 설치하기 위해 별도 기둥을 설치하다보니 이용자들의 동선에 방해가 되거나 꼴불견스러운 구조물이 넓게 설계한 실내 공간을 가로막아 시선을 답답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공간이 바로 바닥이다. 따라서 이용자들의 이동 동선을 따라 바닥을 활용해 강화유리를 사인시스템에 적용한다면 층고가 높은 실내 공간에서 동선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아울러 최근 인텔리젠트 빌딩은 바닥에 전기 배선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됐다. 따라서 내부조명을 이용하면 판독성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간접적인 조명효과와 자연스러운 동선 유도 효과까지도 얻을 수 있게 된다.
일본에 있는 과학미래관은 건물 처음 설계 단계서부터 바닥을 이용한 사인시스템을 계획해 이용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건축이 지닌 투명감이나 전시가 주 설비라는 점을 고려해 가능한 관람자의 시선에 거슬리지 않도록 했다. 규격화한 모듈로 바닥을 마감하고 필요한 곳에 사인 시스템을 설치하는 방법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언제라도 수정, 보완이 가능하다. 이런 방법으로 높은 층고에서도 판독성이 높은 사인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시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단순함과 명확함은 다르다
일반적으로 사인을 통한 정보 전달은 단순하면서도 명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순함이 명확함과 언제나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단순함을 강조하다 보면 그 특징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가 생겨난다. 앞에서 살펴본 컨벤션센터와 같이 한 가지 컬러로 단순하게 전체를 통일시키다 보면 여자 화장실 사인까지도 파란색으로 처리해 버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단순한 것이 모두 명확한 것은 아니다. 명확해지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부분을 생략해야 할 필요성이 생길 수는 있지만, 특징적인 부분까지도 생략해버리면 오히려 명확함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함보다 더욱 무서운 것이 바로 과다한 장식이다. 언젠가 서울에 있는 한 특급 호텔 화장실 사인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린 적이 있다. 그곳 출입구에는 조선시대 문인화에 등장하는 선비와 마님의 모습이 번쩍거리는 금색 판에 음각돼 있었다. 어떤 외국인은 그 화장실 입구에서 자기가 혹시 화장실을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닌지 두리번거리며 들어가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화장실하면 떠오르는 사인 형태나 컬러가 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그 사인 형태나 컬러를 무의식적으로 기억하게 된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체계를 벗어난 사인이 등장하면 갑자기 당혹스러워 한다. 이것은 특급 호텔이라는 고급스러움이나 한국이라는 전통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생겨난 대표적인 과잉 디자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정보는 언제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새로운 발명에 새로운 잘못이 뒤따르듯 디자인 과정에서도 디자이너의 의도가 다른 요인이나 과제에 꼭 들어맞는다고 할 수 없다. 사용자는 여기에서 빚어지는 부조화를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애를 쓰지만 그것도 참고 견디다 못하면 직접 수정을 감행하게 된다. 특히 인포메이션 데스크에서 하루에도 “화장실이 어디에요?”라는 질문을 수없이 반복해서 들어야한다면 그 행동은 더 적극적으로 이뤄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얼마 뒤 찾은 그 호텔 화장실에서 고급스러운 사인 위에 촌스럽지만 명확한 화장실 사인 스티커를 큼직하게 ‘땜빵’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인시스템은 공공시설 이용자를 위한 최소 배려
문제가 생기는 원인에는 언제나 온갖 사정이 다 얽혀있기 마련이다. 사전 조사가 부족한 탓, 필요한 예산이나 전문가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탓, 사인 시스템에 유연성이 빠져있는 탓, 지나치게 단순해진 탓 등이다.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크게 세 가지로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공공건물 설계 초기부터 이용자 동선과 함께 적절한 사인 시스템 도입을 함께 검토해야만 한다. 둘째, 인지공학자, 색채심리학자, 사인디자이너, 조명디자이너 등 각 분야 전문가가 참여해 그 제작 과정을 검증받아야만 한다. 셋째, 사인 설치 이후 사용자의 환경을 받아들여 수정ㆍ보완할 수 있도록 디자인해야만 한다.
앞으로 공공건물에서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나 상징조형물에 많은 예산을 투여하는 것도 좋겠지만 이용자들을 위한 배려로 사인시스템 디자인에 작은 예산이라도 배정할 수 있다면, 화재와 같은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몰라 우왕좌왕 발을 동동거리는 사람들을 줄일 수는 있지 않을까?
박스
공공 정보디자인을 위한 12개 조항


스위스 출신 정보 디자이너 요하임 뮐러 란세이(Joachim Muller Lance)가 주장하는 공공정보디자인을 위한 12개 조항을 천천히 읽으며 가슴에 깊이 간직할 필요가 있다.

1. 너무나 당연한 말
누구든 한번쯤은 정보를 디자인한 경험이 있으리라. 정보 디자이너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제너럴리스트다.
2. 선입견을 갖지 말 것
일하기 전 예비지식은 적을수록 좋다. 이것저것 질문하며 스스로 사용자의 처지가 돼 보는 것이 정보를 일반인에게 쉽게 이해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3. 조사에 대하여
우리 작업은 직접 무엇을 멋있게 만들기보다는 조사나 연구에 더 많은 비중을 둬야 한다.
4. 이성에 대하여
일반 상식은 꼭 필요하다. 비전이나 상상력은 작업에 뒤따라오기 마련이다.
5. 변화에 대하여
사회란 성장하고 흘러가고 변화하는 것이다. 공공정보에 완성이란 없다. 변화를 찾아내어 디자인 할 것. 성장의 여지를 남길 것.
6. 속 깊음에 대하여
단순하게 해서는 안 된다. 다만 명확할 것. 깊이나 상세함에 여러 수준을 둘 것. 그래야 수신자가 어떤 수준의 깊이까지 읽을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7. 폭넓음에 대하여
산뜻한 간결. 다른 것을 섞거나 애매모호해서는 안 된다. 모든 커뮤니케이션이 전부 정보 디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 차이를 인식하고 명확하게 구분할 것.
8. 클라이언트에 대하여
여러 방면 전문가를 참여시켜야 할 지, 어떻게 관여하도록 할 것인지 잘 구분해야 한다. 타이밍, 처지와 구실, 영향을 미치는 정도, 결정권 등을 잘 가려야 한다.
9. 프로세스에 대하여
가장 어려운 부분부터 손을 댈 것. 최악의 시나리오가 해결되면 그 다음은 거의 별 탈 없이 이어진다.
10. 사람들에 대하여
사용자에게 나 자신이 좋은 심부름꾼인지 잘 생각해볼 것. 정보는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들이미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제공해야만 한다.
11. 예산에 대하여
티끌을 태산으로 뻥 튀기는 재주를 익힐 것.
12. 끝으로
사용자가 원하는 것은 디자이너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길….
김경균
프로필 그대로

<SignMunhwa>

위 기사와 이미지의 무단전제를 금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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