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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이 곧 여행이 되는 곳
전라남도 여수시
글 황예하 2021-06-25 |   지면 발행 ( 2021년 7월호 - 전체 보기 )




▲ 여수엑스포역을 나와 길을 건너면 그대로 박람회장을 가로지를 수 있다. 2012여수세계박람회 개최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광장의 마지막 그늘을 빠져나가기 전에 볼 수 있는 풍경. 마스코트였던 여니와 수니의 조형물이 박람회장 입구를 지키고 있다.
여행을 떠날 때 절대 실패하지 않는 방법이 하나 있다. 떠나기 전 당연하고 사소한 약간의 마음가짐을 미리 챙겨놓는 것. 그 심리적 상비약의 이름은 ‘함부로 기대하지 않기’다. 소리 내어 읽는다면 강세는 ‘기대’가 아닌 ‘함부로’에 두어야 한다. 일행이 있건 없건, 목적지가 코 앞이건 물 건너건, 함부로 부푼 마음은 허무한 해프닝에도 구겨져 버리고 마니까. 반드시 끝내주는 여행을 즐기고 말리란 다짐은 잠시 접고 가볍게 숨을 들이켜 보자. 그래야만 코끝에 스미는 바람에서 감칠맛을 느낄 수 있다.

글 황예하 기자 / 사진 황예하 기자, 메가볼트
 


밤바다가 전부가 아니야

꼭 친밀한 사촌을 보러 가볍게 들르는 기분이 들었다. 여수에 가본 일이라곤 2012여수세계박람회장 안에만 몇 시간 머물러 본 게 전부인데도 이상하게 그랬다. 그땐 발 디딜 틈이 없었을 기차역 플랫폼에 오래도록 서성이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붐비지 않는 역전은 한적했지만 허전하지는 않았다. 광장에 설치된 작은 거북선 조형물 앞에서 세 사람의 여행객이 바닥에 핸드폰 하나를 놓고 아옹다옹하고 있었다. 핸드폰을 어디에 두어야 셋이 함께 거북선과 나란히 사진을 남길 수 있을까 고민하는 모양이라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어머, 고마워요!” 여행에 들뜬 목소리가 명랑하게 귀를 울리자 내 마음도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분명 일하러 왔는데, 이상하게 나도 여행객이 된 것 같았다.


▲ 여수 관광명소의 중심지, 이순신광장. 로터리 가운데 늠름하게 세워진 동상 너머로는 여수의 평범한 일상이, 동상과 시선을 같이 하면 역사와 여행의 성지인 여수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바다를 살며시 꼬집듯 양쪽으로 갈라진 여수의 주요 관광지는 오른손으로 치면 엄지손가락부터 손아귀까지에 대부분 모여있다. 가벼운 볼거리, 즐길 거리를 찾아 여수로 향한 손님들이 둘러보는 곳이 여수시민들의 주된 생활권인 시가지 안에 자리한 셈이다. 그중에서도 돌산대교를 기점으로 거북선대교까지를 부채꼴로 훑어본다면 어지간한 관광스폿은 놓칠 일이 없다. 이 부채꼴은 특히 많은 관광객이 찾는 이순신광장과 낭만포차거리, 고소동 천사벽화마을을 모두 포함하는 범위다.

게다가 여수는 크고 작은 산으로 뒤덮인 덕에 바다를 내려다보기 좋은 경사가 사방에 깔려있다. 고소동 천사벽화마을은 그런 지형이 마련해 준 훌륭한 전망대 중 하나다. 주택가 사이를 가로지르는 가파른 계단을 기다시피 올라가 뒤로 돌면 마른 숨이 감탄으로 터져 나온다. 미니어처나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로 층층이 쌓인 알록달록한 지붕과 여수의 섬에 갇힌 작은 바다, 그리고 새파란 하늘이 한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 천사벽화마을의 경사는 아주 가파르다. 오르는 길은 조금 아찔하지만 그 덕에 볼 수 있는 하늘까지 헤엄쳐 갈 듯한 돌고래 벽화엔 먼저 다녀간 여행객들의 손때와 담벼락의 녹이 묻어있었다.


▲ 고양이들이 지키는 집을 지나 언덕을 끝까지 오르면 나오는 노란 벽화. 새로 그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유독 빛깔이 선명한 벽화 앞에서 유독 가팔랐던 계단의 비밀도 밝혀졌다. 보행자 안전을 위해 계단을 새롭게 보수하는 중이었다고.

여수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를 관광명소화했다는 고소동 천사벽화마을은 골목골목이 오래된 사진 속 추억의 장소 같다. 골목부터 계단까지 온통 그림이 가득하다. 마침 밥때였는지 대문간에 앉아 그릇이 채워지길 기다리는 고양이 몇 마리를 지나쳐 언덕 끝까지 오르면 하늘마저 배경으로 삼은 사인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곳이 바로 고소동 천사벽화마을이었다.

푸른 밤, 더운 낭만


▲ 거북선대교 아래로 자리를 옮긴 낭만포차거리. 해가 저물면 거북선대교와 하멜등대의 불이 밝혀지고, 그 앞을 지나는 여객선에서도 화려한 조명을 켠다. 그즈음이면 케이블카는 별처럼 반짝이며 머리 위를 지나는 곳. 포차마다 달린 채널사인은 크기가 일정해 각자 색상이 제각각임에도 크게 어지럽지 않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 조성한 광장이나 먹자골목은 기대는커녕 안 봐도 뻔하리란 편견이 분명 존재한다. 그런 이유로 여행을 계획하며 장소를 피해 동선을 짜는 사람들도 있고, 정형적으로 조성된 생태지만 여행객들이 모여 빚어지는 특유의 분위기가 좋아 빼놓지 않고 들르는 사람들도 있다. 나의 경우는 전자도 후자도 아닌 중간에 가까웠다. 딱히 싫어서 피하지도 않고, 좋아서 콕 집어 방문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거기 사인이 많을 것 같아서, 사람을 불러 모으는 장소엔 조명과 사인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기 마련이니까. 그게 내가 이순신광장과 낭만포차거리를 찾은 이유의 전부였다.

거북선이 건조된 도시인 여수는 어디를 가도 충무공과 거북선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지만, 이순신광장은 그중에서도 특히 주변 유적지와 연계성이 좋다. 충무공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본영으로 사용했던 진남관은 물론 여수연안여객터미널, 낭만포차거리까지도 도보로 이동 가능한 곳이라 여수 관광명소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다. 광장 바로 옆에도 좌수영 음식문화거리가 조성되어 있으니 멀리 가지 않더라도 여수의 대표적인 먹거리와 볼거리를 즐길 수 있는 것도 이순신광장의 장점이다.


▲ 넙내리방파제 옆 자전거 산책로를 끼고 있는 ‘서목’에서는 이순신광장 부근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여수 바다를 볼 수 있다. 높이가 적당한 의자에 앉으면 마주 보이는 소경도의 머리 위로 윈도그래픽이 떠오른다.

낮에 목표했던 취재를 모두 마치고 가볍게 산책한단 마음으로 다시 숙소를 나섰다. 저녁때가 되어 찾은 낭만포차거리는 여행의 흥취와 일상으로부터의 해방감이 한데 섞여 열기를 뿜어내는 곳이었다. 포차거리 입구에서 만난 친구에게 그날 있었던 황당한 일을 털어놓는 여수사람도, 거리 가운데 놓인 조형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싶다며 먼저 핸드폰을 건네는 여행객들도 볼 수 있는 곳. 널찍한 거북선대교 아래를 왁자하게 채우는 목소리들이 노랫소리 같았다.

낭만포차거리는 애초 종포 해양공원에 조성되었으나 인근 주민들이 불편을 겪을 정도로 붐비는 바람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진 상권이다. 그 탓에 이전처럼 여수 밤바다를 보며 술잔을 기울일 수 없게 되어 아쉽다는 의견도 있지만, ‘하멜등대’와 거북선대교의 조명이 있어 ‘여수 밤바다’의 노랫말만큼은 여전히 유효한 곳이었다. 그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를 헤아려 보다가 하늘이 점점 파르라니 어둑해져도 시간 가는 게 아쉽지 않을 정도로.

사람이 있어 사인이 있다
365개의 섬, 2012세계박람회, 여수 밤바다. 내가 알던 여수는 이 세 개의 키워드만으로 구성된 곳이었다. 다섯 손가락도 채 꼽지 못하는 것이 민망하니 굳이 두 단어를 더 끌어올려 보자면 이순신, 동백꽃이 떠오르는 곳. 고향과 가깝다는 것 하나로 정체 모를 친밀감을 느꼈지만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다. 집에서 막 출발하려는데 미처 챙기지 못한 물건이 떠올랐을 때 말하듯이,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 여수를 종점으로 하는 KTX 열차에 올라서도 큰 심경의 변화는 없었다.


▲ 파란 하늘이 배경이 되는 ‘와이드커피스탠드’. 맑은 날이면 그 어떤 간판보다 시인성이 좋은 배경이 있어 윈도그래픽 뿐이어도 눈길이 갔다. 가게 앞에 세워진 주황색 라바콘과 노란 자동차까지 익스테리어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곳.

그런 건조한 기자를 보통의 여행객으로 만들어 준 건 오롯이 여수였다. 셔터를 대신 눌러줬을 뿐인데 나까지 들뜨게 만들던 여행객들이 기대했을 그 여수. 예쁜 것을 보고 싶어 하고 좋은 기억을 쌓고 싶어 하는 여행객들이 공연히 목적지를 고르고, 행선지를 정하는 것이 아니니까. 여수엔 그들이 기대하는 것들이 반짝반짝 운집해있었다. 보기 좋은 사인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도 맞지만, 사람이 모이는 곳이어야 사인이 생긴다. 그러니 닭과 달걀처럼 사람과 사인은 서로에게서 비롯하여 모였다가 사라지고, 사라져도 또 모이는 셈이다.

취재 첫날 귀여운 간판에 이끌려 들어갔다가 여수에 머무르는 사흘 내내 들렀던 푸딩가게가 하나 있다. 마지막 날 아침, 짐을 가득 챙겨 멘 내게 포장된 푸딩을 건네던 사장님이 조심스레 물으셨다. “여행 오셨었나 봐요”.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깨달았다. 결국은 나도 사인에 이끌려 여수를 헤맨 여행객에 불과했단 것을. 기차역으로 가기 위해 호출한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바다를 내려다 보았다. 그제야 바닷바람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왜 모두가 여수의 밤바다를 노래하게 되었는지도.

 

<SignMun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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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태그 : 여수 이순신광장 낭만포차거리 고소천사벽화마을 하멜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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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트렌드+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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