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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기억의 도시
솔향 강릉
글 황예하 2021-09-27 |   지면 발행 ( 2021년 10월호 - 전체 보기 )




▲ 명주동을 지나는 사람들이 생활관광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현수막이 설치되어 있다. 한산한 골목 곳곳에 상쾌한 색 현수막이 걸려 있어 못해도 한 번은 들여다보게 된다.

자연과 기억의 도시, 솔향 강릉

여행을 오래 기억하는 방법은 저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뭐라도 기억을 남기려면 일단 에피소드가 있어야 한다. 현관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되어버린 여행의 우여곡절 끝에 겪은 일이든, 어쩌다 맞이한 우연 같은 행운이든. 사건이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가 기억이 되는 법이니까. 하다못해 아이스크림이라도 먹는다든가. 바다와 소나무로 가득한 강릉은 그럴 만한 ‘아이스크림’이 가득한 곳이다. 일단 베어 무는 순간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는 도시. 입맛에 맞든 맞지 않든 먹어봤단 자체만으로 마음에 심길 여행지, 강릉.

글 황예하 기자 / 사진 황예하 기자, 메가볼트

본 기획 취재는 국내 콘텐츠의 발전을 위하여 (사)한국잡지협회와 공동으로 진행했습니다.
 
 
 
경쟁상대가 자연이라면


▲ 안목해변 커피거리에는 바다가 환하게 담길수록 인기가 좋아 창이 큼직큼직한 카페가 많이 있다. 커피거리를 걷다 보면 그 규모에 비해 나긋한 크기를 가진 간판들을 보며 어디를 갈지 고르는 여행객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주문진, 사천진, 사근진, 강문, 안목, 정동진… 해변 이름만 꼽아도 줄이 한참 길어지는 강릉. 여름 휴가철이면 바다와 소나무, 단오제나 영화제를 즐기기 위한 사람들이 단위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곳이다. 파도의 색과 여행의 목적이 너무나도 뚜렷해서 사인은 일단 제쳐두고 바다로 먼저 뛰어드는 곳.

그래서일까, 강릉의 관광명소는 대부분이 풍광을 이웃하거나, 멀지 않은 거리에 두고 있다. 일렬로 걷기 좋게 이어지는 해안가에 자리 잡은 카페는 창이 큼직할수록 인기가 좋고, 지역 먹거리로 유명한 상권조차 포말에 젖은 발을 끌고 터벅터벅 10분만 걸으면 초입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니 다시 말하자면, 강릉은 사인이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저 혼자의 힘으로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기는 어려운 환경인 셈이다.

바다를 바라보도록 꾸며진 카페가 가득한 안목 커피거리는 해가 쨍쨍한 대낮에도 간판에 불이 밝혀진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바다가 동해이기 때문에 하늘이 파란 대부분의 시간이 역광인 탓에 큰 의미는 없다. 더 강한 광원이 등 뒤에 있으니까. 대신 커피거리의 수많은 카페들은 파도보다 화려해지기보단 프레임이 되기를 꾀했다.

깊은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를 오래도록 머물며 바라볼 수 있도록 널찍한 창과 편안한 좌석을 갖춘 커피거리 카페들은 ‘여기 저희 가게도 있어요’ 넌지시 말해보는 듯한 사인을 가졌다. 그래서 오히려 걷는 재미가 있다. 쳐다볼 수밖에 없게 거대하거나 요란한 사인이 아니라 각자 규모와 콘셉트에 어울리는 간판을 가졌기 때문에.

바다보다 큰 존재감을 가질 수 없음을 아는 이 상권이 선택한 ‘여기 저희 가게도 있어요’ 전략은 성공적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자동차 키와 지갑이 준비물의 전부인 듯한 방문객들이 곧장 커피거리 카페 중 한 곳을 찾아 직진하는 동안, 또 다른 한 무리의 여행객이 주차장에 등장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바다를 향해 사람들이었다. 모래사장을 밟기 전 커피거리 상권이 만들어 낸 그늘 끝에서 신발을 벗던 그들 중 누군가가 일행에게 제안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이따 저기 가볼래?”.
 
 
이유가 필요하지 않은 이유
 

▲ 강릉 먹거리를 얘기할 땐 해수를 사용해 만드는 순두부를 빼놓을 수 없다. ‘초당 순두부 마을’에는 순두부를 이용한 각양각색의 요리와 사인이 즐비하다.

경치 좋은 목마다 이름이 붙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그런 자리에 큼직한 카페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 생기는 것도 이제는 당연하게까지 느껴진다. 여행객의 시선을 오롯이 차지하는 자연이 있고, 그 옆에 혹은 맞은편에 자리한 이상 사정은 거의 비슷비슷하다. 풍경이 먼저 여기 있었으니, 명소는 그다음이다.

경포호 인근 핫 플레이스로 이름난 카페 ‘테라로사’와 가족 단위 여행객이 많이 찾는 공원이자 박물관, ‘오죽헌’도 그렇다. 동시에 두 장소는 서로 결이 달라 더욱 흥미롭다. 자연 먼저, 명소 다음이었던 것까지는 비슷하다. 그러나 경포호로 흐르는 경포천 옆을 터로 정한 테라로사는 평범했던 천변을 창이라는 액자를 통해 명소로서 자리 잡은 곳이고, 율곡 이이의 생가 오죽헌은 그 이름의 유래부터 테라로사의 시작과는 정반대 순서다.

오죽헌은 집터 주위에 까마귀처럼 검은 대나무가 많다 하여 이름 붙여진 집이었는데, 그 뒤 시에서 박물관과 기념관을 조성하며 더욱 들러볼 만한 장소가 됐다. 여행객들은 상반되는 이 두 명소 모두의 성격을 즐긴다. 그 재미의 공통점은 ‘그것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풍경이 특별하고, 명소가 그 매력을 배가해줘서. 그런 이유로 관광객들은 자연과 이웃하는 명소를 사랑하고, 찾아간다. 자연과 명소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 경험을 누려 기억에 남겨놓으려고.
 
 
일상처럼 시나미 쉬어가는 곳
 

▲ 강릉 생활관광 프로그램 ‘시나미 명주나들이’와 협력하는 가게들. 시나미 명주나들이라 적힌 깃발이 꽂힌 가게는 프로그램에서 제공하는 지역 쿠폰으로 이용할 수 있다. 울창한 담쟁이에 사인이 가려져 버린 가게는 ‘봉봉방앗간’, 돌출간판 위 손글씨가 멋진 가게는 ‘럭키하우스’.

이제까지는 내내 물가의 명소 이야기를 했으니 마지막으로는 내륙 쪽 이야기를 할 차례가 됐다. 여행에 대한 기억을 만들기에 좋은 방법은 역시 에피소드를 남기는 것이고, 풍광을 그냥 보고 오는 것보다는 아이스크림이라도 먹고 오는 게 기억에 남는다.

이제까지 강릉의 관광명소에서 ‘아이스크림’의 역할을 하는 것은 대부분 해안가였다. 그런 강릉에서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 성수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해안가도 아닌 천변에 사람이 모일 때가 있다. 매해 여름 개최되는 단오제를 즐기기 위한 인파다.
단오제는 음력 5월 5일을 전후로 강릉의 허리쯤 되는 자리를 가로지르며 동해로 흐르는 남대천변을 따라 길게 축제 천막과 간이 무대가 설치되고, 불꽃놀이로 마무리되는 축제다. 이 축제와 가장 가까운 동네는 강릉 구도심인 명주동과 용강동인데, 이제까지는 시내에서 단오제를 보러 가는 동안 지나치는 동네나 길목 정도에 불과했다. 축제 행렬을 따라 정신없이 걸은 후 한적한 장소에 가고 싶을 때 계단을 오르면 나오는 곳.

하지만 이곳에도 전국 곳곳에 부는 로컬 문화 발전을 도모하는 바람이 솔솔 불어오며 환기가 시작됐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1 생활관광활성화 공모 현지나들이형 사업’으로 파랑달협동조합에서 운영 중인 ‘시나미, 명주나들이’. 올해로 2년째를 맞이한 이 동네 여행 프로그램은 약 40분 가량 명주동과 용강동을 중심으로 여행객이 아닌 ‘강릉 사람’으로서 강릉의 삶을 둘러보는 해설사 투어다. 이름 속 ‘시나미’는 ‘천천히’, ‘느리게’를 뜻하는 강릉 사투리다.


▲ 해설사와 함께 명주동 나들이를 마치면 종점인 파랑달 앞에서 해산한다. 그때 눈을 돌리면 가장 먼저 보이는 ‘오월커피’의 모습. 적산가옥을 개조한 카페로, 이색적이고 차분한 분위기로 인기 있는 곳이다.

오후 프로그램인 ‘명주마실코스’가 시작되기 12분 전, 우연히 발견한 현수막에 이끌려 투어를 신청했다. 운 좋게도 투어에 참여하는 사람이 2년 전 단오제를 마지막으로 강릉에 한 번도 들러본 적 없는 기자 하나, 그러니까 나뿐이었다. 투어 시작점까지 부지런히 뛰어간 덕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명주마실을 시작했다. 1만 원 하는 참가비를 낼 때 제공 받은 안내소로부터 제공받은 프로그램 안내서와 지도는 투어 내내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다. 명주동 주민해설사와 골목을 걸는 동안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주차장 구석에 있어 혼자 둘러봤더라면 놓쳤을 옛 강릉읍성의 흔적, 얼마 전 새로운 주인을 찾았다는 폐업한 카페의 이름이 ‘7커피’였던 이유. 골목 사이사이 뚫린 숨구멍이 실은 복개천이기 때문이라는 것과 복개 이전 땅의 높이를 가늠할 수 있는 오래된 담장 같은 것들은 안내서나 지도에 담을 수 없는 ‘명주동 사람’의 이야기였다.

투어를 시작할 땐 악수 대신 나눈 하이파이브조차 어색했던 주민해설사이자 명주동 어르신과는 어느 순간부터 보조를 맞춰 시나미 걷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명주동 주민들을 마주쳤을 때, 해설사 어르신과 함께 인사 나누는 동안은 여행객이나 이방인이 아니라 ‘명주마실’ 나온 사람이 되었다.

투어가 끝나갈 쯤 푸른 잎이 무성한 어느 집 마당 앞을 지나치며 해설사 어르신이 아쉬운 말씀을 하셨다. “이 집 장미가 정말 예쁘게 피는데. 꽃 좋아하니까 오월쯤 왔으면 정말 좋아했을 텐데…”. 빈말에 재능 없는 입에서 의지를 가진 말이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내년에 또 올게요. 아이스크림을 거하게 삼킨 듯 선명하게 남을 기억이었다.

  

  
※ 위 내용은 기사의 일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사인문화 10월호를 참고하세요.

<SignMunhwa>

위 기사와 이미지의 무단전제를 금지합니다. 

관련 태그 : 강릉 명주동 안목커피거리 초당순두부마을 오죽헌 테라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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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트렌드+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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